[정책위 논평] 예산은 늘었다, 이제 문화예술정책의 방향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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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예총 정책위 – 논평]
2027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안에 대한 한국민예총 정책위원회 논평
예산은 늘었다, 이제 문화예술정책의 방향을 물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27년 예산안으로 9조 6,345억 원을 편성했다. 전년보다 22.6% 증가한 역대 최대 규모이며, 특히 문화예술 부문은 3조 8,545억 원으로 44.6% 늘었다. 오랫동안 문화예술에 대한 공공투자 확대를 요구해 온 예술현장으로서는 의미 있는 변화다.
예술인 사회안전망을 강화한 점도 평가할 만하다.
예술인 기초생활보장 지원을 대폭 확대해 국민연금과 산재보험 지원을 늘리고 건강검진을 새롭게 지원한다. 예술활동증명 처리인력을 확충하고 생활안정자금과 전세자금 융자도 확대한다. 문학·시각·다원예술 등 기초예술 창작지원과 창작 기반 사업을 확대하고, 지역예술활성화 사업을 새롭게 편성한 점도 긍정적이다. 중소형 공연과 전시의 지역 순회, 독립예술영화와 인디음악 지원 확대 역시 문화예술생태계의 기반을 넓힐 수 있는 정책이다.
그러나 예산이 늘었다는 사실만으로 문화예술정책의 진전을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늘어난 예산이 어떤 철학과 구조를 통해 누구에게 도달하는가이다.
예술인 복지 확대 환영, 중앙집중적 ‘증명’에서 지역의 ‘등록·인정’으로
이번 예산안에서 예술인 복지가 크게 확대된 것은 환영한다. 하지만 예술활동증명 문제에 대한 정부의 해법이 행정인력 확충과 처리 지연 해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예술활동증명은 현재 단순한 예술활동 확인절차를 넘어 각종 복지와 지원정책에 접근하기 위한 사실상의 관문이 되어 있다. 처리 지연이나 갱신 불안정은 행정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인의 복지 접근 자체를 지연시키는 문제가 된다. 신청이 몰릴 때마다 심사인력을 늘리는 방식으로는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술활동증명 문제는 단순히 심사 인력을 늘려 처리 속도를 높이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현재처럼 “누가 예술인인가”를 중앙기관이 반복 심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예술활동을 지역에서 등록하고 확인하는 분권형 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등재·인증 체계를 참고해, 문체부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전국 공통의 기준과 운영지침을 마련하고, 일정한 전문성과 공공성을 갖춘 지역문화재단과 지역·장르별 예술 협단체를 ‘예술활동 등록기관’으로 인증하는 방식을 검토할 수 있다. 이들 기관이 신규 등록과 갱신, 활동 확인을 담당하고, 중앙은 기관 인증·재인증, 기준 관리, 데이터 통합, 이의신청과 예외적 전문심의를 담당하는 구조다. 다만 등록기관의 판단이 특정 협회나 기존 장르 질서의 진입장벽이 되지 않도록, 회원 여부와 관계없는 공개된 등록기준, 이해충돌 방지, 이의신청 절차, 정기적인 기관 재인증 제도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
기존 활동 이력이 확인된 예술인의 갱신은 지역 등록기관의 확인만으로 신속하게 처리하고,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만 별도 심의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업무 이관이 아니라 예술활동증명을 중앙집중적 자격심사에서 지역과 현장이 참여하는 등록·인정 체계로 전환하는 일이다. 예술인복지 역시 지역문화재단과 예술 협단체가 상담·신청지원·사각지대 발굴을 담당하도록 해 예술인의 삶 가까이에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복지와 권리도 구분해야 한다. 국민연금, 산재, 건강, 주거, 돌봄, 소득안전망은 예술인 복지의 문제다. 반면 공정계약, 적정 사례비, 준비·연습·기획 등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한 보상, 표현의 자유, 저작권과 AI 시대 창작자의 권리는 예술노동권과 창작권의 문제다. 복지를 확대하면서 권리정책을 함께 강화해야 비로소 예술인이 지속적으로 창작할 수 있다.
법·조직·예산이 모두 ‘산업진흥’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
더 큰 우려는 2027년 예산안을 최근의 제도 변화와 함께 보았을 때 드러난다.
지난 9월 3일 정부는 공공기관 기능개혁안을 발표하며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을 가칭 ‘한국문화예술산업진흥원’으로, 지역문화진흥원과 문화예술교육진흥원 등을 가칭 ‘한국문화진흥원’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이미 이 개편이 충분한 현장 숙의 없이 추진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전문성과 현장 네트워크를 가진 기관을 행정 효율성이라는 기준으로 대형화할 경우 문화예술생태계의 다양성과 현장 접근성이 약화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특히 ‘문화예술산업진흥원’이라는 명칭이 상징하는 방향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예술경영과 공예·디자인, 문화공간 운영 등의 기능이 ‘산업진흥’이라는 하나의 틀로 수렴될 경우 예술의 공공성, 실험성, 자율성이 시장성과 경쟁력의 기준 뒤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 ‘한국문화진흥원’ 역시 지역문화, 문화예술교육, 전통문화, 문화정보라는 서로 다른 정책 영역을 추상적인 ‘진흥’의 대상으로 묶는 방식이 각각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7월21일 국회에 발의된 문화예술진흥법 전부개정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오래된 법체계를 전면적으로 정비하고 변화한 문화예술 환경을 반영하려는 취지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개정안이 ‘예술산업’의 정의를 새롭게 도입하고 창업·융자·기술개발 등 산업지원의 법적 근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와 동시에 기초예술, 지역예술, 전통예술, 사회적 예술의 공공적 가치와 문화다양성, 문화권, 예술인의 창작권과 노동권 역시 분명한 법적 원칙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예산에서는 콘텐츠 정책금융과 대형 IP, R&D, 해외진출 투자가 확대되고, 법에서는 예술산업의 근거가 강화되며, 조직은 문화예술산업진흥원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법·조직·예산이 모두 산업진흥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정렬될 수 있다. 문화산업의 성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문화산업정책이 문화예술정책 전체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지역을 소비시장을 넘어 문화자치의 장으로
지역 관련 예산도 같은 기준에서 살펴봐야 한다. 지역예술활성화 사업 신설과 공연·전시 유통 확대는 반가운 변화다. 그러나 중앙의 우수 작품을 지역에 순회시키고 지역축제와 연결하는 것만으로 지역문화 생태계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관광 분야에서는 지방공항 중심 관광권, K-콘텐츠 체험, K팝 관광상품화 등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진다.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목적은 이해하지만 지역이 다시 관광객과 문화상품의 소비시장으로만 위치 지어져서는 안 된다. 지역문화정책의 출발점은 관광객 수나 경제효과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문화권과 지역 예술인의 지속가능한 창작이어야 한다.
지역문화재단 역시 중앙사업의 집행기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술인복지, 문화권 보장, 문화다양성, 지역 예술생태계 지원, 시민 참여, 생태전환을 연결하는 문화자치 플랫폼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번 예산안에서 강조된 지역사업도 지역 예술인과 시민의 정책 결정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집행되어야 한다.
청년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19세에서 34세까지 확대된 청년문화패스는 청년의 문화접근권을 넓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청년을 문화의 소비자나 단기 일 경험의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청년예술가가 실패하고 실험하며 천천히 성장할 수 있도록 과정 중심 창작지원, 안정적인 소득 기반과 창작공간, 장기적 성장 지원도 함께 확대되어야 한다.
예산에서 빠진 과제, 기후위기와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적예술
이번 예산안에서 특히 아쉬운 것은 기후위기와 생태전환, 사회적 예술에 대한 정책적 대응이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후위기는 이미 문화예술의 창작환경과 지역사회의 삶을 직접 변화시키고 있다. 폭염과 폭우는 야외공연과 축제의 안전을 위협하고, 공연·전시·축제의 제작과 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과 폐기물 문제 역시 더 이상 문화정책 밖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예산안에는 문화예술 분야의 기후위기 대응 기본계획, 친환경 제작 지원, 문화시설의 생태전환, 기후위기 예술창작 지원 등이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았다. 문체부는 공연·전시·축제와 공공문화시설의 생태전환을 독립적인 정책과제로 설정하고, 그에 따른 비용과 행정 부담을 개별 예술가와 단체에 떠넘기지 않는 공공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사회적 예술에 대한 부재는 더욱 분명한 정책적 공백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예술은 민주주의, 인권, 노동, 평화, 생태와 지역공동체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시민의 목소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과 내란 사태 이후 시민과 예술인들은 다시 광장에 섰다. 응원봉과 노래, 공연과 풍자, 깃발과 다양한 문화적 표현은 단순한 집회의 장식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고 서로를 연결하는 광장의 언어였다. 예술은 그 과정에서 시민의 분노와 두려움, 연대와 희망을 표현하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공공적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2027년은 6월 민주항쟁 40주년이자, 12·3 비상계엄 이후 시민들이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경험을 새로운 민주주의의 자산으로 이어가야 할 시기다. 1987년의 거리와 2024~2025년의 광장은 예술이 민주주의와 분리될 수 없음을 다시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이번 예산안에서는 이러한 역사와 경험을 문화정책으로 이어가기 위한 사회적 예술 지원체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체부는 민주주의 예술 아카이브, 6월 민주항쟁 40주년 문화예술사업, 12·3 광장문화 기록과 연구, 지역 사회참여 예술 프로젝트, 민주주의·인권·노동·평화·생태를 주제로 한 창작지원을 별도의 정책영역으로 마련해야 한다. 사회적 문제에 응답하는 예술을 정치적 부담이나 주변적 활동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적 공공재로 인정해야 한다.
2027년 문체부 예산안은 분명 이전보다 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다. 예술인복지와 기초예술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고, 문화향유와 지역 유통에 대한 공공재정이 늘어난 것을 우리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예산의 크기가 정책의 방향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산업 성장과 수출 경쟁력을 넘어 문화다양성을 보장하고, 창작-유통-향유의 생태계를 살리며, 예술인의 삶과 권리를 지키고, 지역의 문화자치를 강화하는 정책이다.
한국민예총은 2027년 예산의 확대가 문화산업의 성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문화예술생태계 전체의 회복으로 이어질 것을 요구한다. 아울러 공공기관 통폐합과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과정에서도 효율성과 산업성만이 아니라 현장의 자율성, 전문성, 문화다양성과 문화민주주의를 정책의 중심에 둘 것을 촉구한다.
2026년 9월 14일
(사)한국민예총 정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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